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폴레옹 3세 (문단 편집) ==== [[제국주의]]적 외치 ==== 강력한 [[제국주의]] 팽창 정책을 펴서 [[응우옌 왕조|베트남]] 침공, [[제2차 아편전쟁]], [[병인양요]], [[크림 전쟁]], [[이탈리아 통일]] 전쟁 등을 치렀다. 1858년에 이탈리아 통일 문제에 무관심한 것 때문에 로마에서 분노한 [[암살]]자들의 폭탄 공격을 받았으나 경상으로 목숨을 건진 오르시니 사건이 일어났다. 한편 주범 펠리스 오르시니는 체포된 후 황제에게 감화되었고 나폴레옹 3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이탈리아 통일 문제에 신경 쓰게 된다. 1863년 ~ 1864년에는 [[멕시코]]에 개입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공 [[막시밀리아노 1세]]를 황제로 추대하여 [[멕시코 제2제국|친(親)프랑스 괴뢰국]]을 세우려 책동했으나,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이 거세게 항의하자 물러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중동에서는 [[이집트]]에 적극 진출하고 남미에서는 [[안데스 산맥]] 일대를 통괄하는 친프랑스 국가를 세우려 하는 등의 확장책을 펼쳤으나 대부분의 경우 다른 열강들과의 갈등이나 황제 개인의 허영으로 인해, 대부분의 해외 원정에서 프랑스군이 크게 선전했음에도 결국 실리적인 성과를 크게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의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를 지원해 [[안시]]나 [[샹베리]] 등 [[사부아]] 지역과 [[니스]]를 획득했으며[* 그 전까진 [[사보이아 왕조]]의 영토였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를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만드는 등 어느정도 대외적인 업적도 있다. 외교 면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큰아버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실패한 원인이 영국을 적대한 데 있다고 보고 영국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서유럽의 양대 강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오랜 경쟁과 갈등이 없어질 수는 없었지만, [[아편전쟁]]이나 [[크림 전쟁]] 등에서 그런대로 협조가 가능했고, 이것만으로도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프랑스가 베트남 등으로의 확장을 시도할 때도, 영국은 촉각을 곤두세우기는 했지만 강하게 제동을 걸지는 않았다. 다만 이는 당시 프랑스의 확장이 영국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세기 들어 영국은 프랑스 대신 떠오른 육상제국 [[러시아 제국]]을 제 1의 경계대상으로 삼고 유라시아 전역에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며 견제했고, 결국 프랑스는 과거보다 영국의 견제에서 자유로운 입장이 되었다. 또한 벨기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의 주요 유럽 국가와 자유 무역을 위한 관세 협정을 맺어 무역을 크게 증진시키기도 했다. [[조선]]에도 세력을 뻩으려는 시도를 했다. 1866년의 '''[[병인양요]]'''가 그의 치세에 벌어졌다. 다만 1846년의 개항 요구는 [[7월 왕정]] 시절이라 나폴레옹 3세와는 관계없다. 해군의 전략적 지위를 인정하고 체계적인 해군 증강계획을 세워 세계 최초의 [[철갑함]]과 증기추진 전함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건조 중인 것을 포함하여 전열함 51척[* 그 중 범주함 37척, 스크류함 14척], 프리깃함 82척[* 범주함 40척, 스크류함 23, 외륜함 19척], 코르벳함 38척[* 범주함 18척, 증기함 20척]을 주력으로 하는 336척까지 도달했고, 이러한 막강한 함대를 바탕으로 프랑스는 18세기 이후 다시 한번 영국 해군과 경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르본 왕조]]의 [[이사벨 2세]]가 쫓겨나면서 발생한 [[스페인 국왕]] 선출 문제에서 노련한 [[프로이센 왕국]]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끌려다니는 외교로 프랑스의 국제적 고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거기에 위에서 언급한 멕시코 문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을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로 즉위시킨 뒤 멕시코를 프랑스의 영향권에 두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멕시코는 공화국이었고 그 결과 멕시코는 황제와 대통령이 공존하는 국가가 되었다. 결국 막시밀리아노 1세는 멕시코에서 총살당했다. 이때 막시밀리아노 1세의 아내인 [[멕시코의 카를로타|벨기에의 샤를로트 공주]]가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나폴레옹 3세는 그저 '''"그 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만 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전 유럽에서 큰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프랑스 내부에서도 황제에 대한 지지율이 급락했다. 여담으로 샤를로트 공주는 이후 조국인 벨기에로 돌아갔지만 남편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미쳐버렸고, 당시 벨기에의 국왕이자 그녀의 오빠였던 [[레오폴드 2세]]도 그녀를 냉대했다고 한다.], 병환의 악화 등 계속되는 악재로 인해 나폴레옹 3세는 1860년대 후반부터 권력을 하나둘 내려놓으면서 입헌군주제로의 변화를 꾀했다. 보불전쟁 직전 즈음에는 권력의 대부분이 황제의 손을 떠난 상태였고, 실권은 의회가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라인강]] 소(小) [[라인란트]], [[자를란트]], 팔츠 지방 [[란다우]] 및 [[룩셈부르크]][* 국내 서적에서 나폴레옹 3세가 라인란트 전체를 요구했다는 서술이 많은데 요구한건 [[프로이센]]령 자를란트, 팔츠 지방 [[바이에른 왕국]]령 란다우와, 중립국 [[룩셈부르크]]였다. 이는 [[빈 회의]] 때 초반 프랑스 국경을 1792년 1월 1일 당시 국경으로 축소시키려 했을 때, 프랑스령으로 남았으나 [[백일천하]]로 취급이 더 가혹해져서 1790년 1월 1일 당시 국경으로 수정되어 독일 연방에 할양된 영토로 소(小) 라인란트라고 칭한다. 출처는 세계외교사(김용구)], [[벨기에]]를 집어삼키려 집적거렸으나 이는 영국을 자극해서 영국의 여론이 친프로이센으로 기울어 프로이센에 우호적 중립을 지키는 삽질이었으며 결정적인 패착으로 꼽힌다. [[엠스 전보 사건|프랑스 여론이 비스마르크에게 거하게 낚여]] 1870년에 [[보불전쟁]]을 개전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으며 이로 인해 완전히 망했다. 사실 나폴레옹 3세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이 전쟁준비가 제대로 되지 못한 상황이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 여론은 프로이센과 전쟁을 해야한다며 들끓었고 나폴레옹 3세조차 이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민중의 지지로 황제가 된 포퓰리스트였고, 민중의 요구를 무시했다가는 민중들의 불만을 사게되어 폐위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는 순전히 위정자들의 결정에 의해 전쟁이 벌어지는 전근대 국가와 달리 '근대적 민족주의'가 확립된 국가에서는 시민의 여론이 위정자들의 등을 떠밀어 전쟁이 벌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